막내 딸의 역마살 편지
[런던_2010] 자립이라는 것. 본문
사랑하는 아빠, 엄마께,
오늘 문득 영국에 처음 오던 날 생각이 나요.
이제는 신랑이랑 같이 외국을 나가니, 걱정없다 하던 엄마말씀도 생각나고,
비행기타고 내려와서 아는 사람 하나없는 이 외국땅에 또 무얼 하겠다고 나는 이 모험을 시작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던 생각도 나고...
오늘은 밖에 비가 엄청나게 오고 있어서 그런지, 마음도 센치해지고,
2년전 9월 비오던 날들이 생각나요.
영국에 꿈에 그리던 학교에 합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학교가 별거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갈까 말까 고민도 하고 했는데,
신랑의 독려가 없었더라면 아마 오지 않았을 것 같아요.
또 다시 시작하는 나의 이 역마살 인생을 어떻게 나는 감당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그렇지만, 역시나 설레는 마음도 있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면 자동적으로 생기는 나의 이 이상한 힘들도 무시못하고,
이렇게 영국행을 마음 먹었는지도 몰라요.
9월 말에 도착하기전에 잠깐 살 방을 알아보고,
도착해서는 우리가 오래 있을 집을 알아보러 다니면서,
학교 공부도 시작되었어요.
시드니에서 공부한 것이 많이 도움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시드니 졸업후 3년의 공백이 엄청나게 나를 다시 처음으로 돌려놓은 듯 했고,
더 어려진 학생들과 공부를 하려니 그것이 쓸데없는 걱정까지 불러오는 듯 했어요.
그럴 수록 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그럴 수록 더 힘빠져서 신랑한테 투정만 부렸던 것 같아요.
어느날 시드니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를 런던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시드니에서 그렇게 꿈에 그리던 학교에 왔냐" 면서 나를 축하해 주더라구요.
아... 내가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하대요.
3년... 짧은 시간이었지만, 또 긴 시간이기도 했나봐요.
나한테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요. ^^
바드시 학교 수업을 따라가면서
신랑은 어학을 하면서,
집도 알아보고, 사업 구상을 하면서
쏜살같이 2개월이 지나고,
집도 구하고, 시업도 시작하고,
학교에 과제도 제출하면서 또 한학기가 다 지나는 거예요.
참 시간이 야속하게 빨리도 가대요.
매일 같이 정신없이 토론 준비를 해가고, 발표를 하고,
에세이를 써대고,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고,
지옥같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써가던 논문을 드디어 제출하는날,
아... 1년이 이렇게 가는구나... 싶더라구요.
엄마아빠한테 전화가 오는 날에는
'응.. 잘 지내. 뭐 공부도 잘 돼.' 말고 사실 할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어디서 부터 이 인생의 정신없음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그토록 짧은 단어의 나열들로 안부를 전했던 것 같아요.
1년을 그렇게 보내고 한국에 잠시 들러 아빠엄마를 만나던 날,
어떻게 1년이 갔는지, 나는 그게 어제만 같은데
엄마 아빠 얼굴에는 왠지 주름살 하나 더 그려진 것 같아,
시간의 이상한 흐름들을 나는 묘하게 느끼고 있었어요.
아빠 엄마의 품을 에저녁에 떠난 줄 알았는데,
신랑과 나의 인생을 찾아 영국에 왔을 때, 그제사야, 난 내가 둥지를 떠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 같아요.
엄마아빠는 나를 항상 보호해 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나도 아빠엄마가 기댈 수 있는 딸이 되어야 한다고 슬며시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여전히 그런 딸이 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데도,
하나 하나 깨달아 실천하기까지 기다려주시는 엄마 아빠께 항상 감사드려요.
자립, 독립 이라는 것이 주관을 세우고, 내가 결정한 일에 내가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무언 가를 이루고,
경제적으로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나를 책임질 수 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이제서 들어요.
나를 보호하던 사람들을 책임지고 보호하고,
나를 둘러싸던 환경을 생각하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의무를 진 사람들을 보호하고 챙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립, 독립한 어른이라는 것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어요.
왜 인간은 그렇게도 무지해서,
자라는 동안 내내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가슴에 와서 박히지 않다가,
때가 되어 내가 성숙했을 때만 이렇게 깨달아 지는 걸까요.
진작에 내 가슴에 와서 박혔더라면, 나는 좀 더 다른 사람이 되어있지 않았을까요. ..
한국 떠나온지도 벌써 2년이 훌쩍지나 3년차예요.
이런 시간이면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났구나 생각할텐데,
어쩌면 떠나온 그날이 어제 같을까요.
한국에는 눈이 많이 왔다는데,
눈 쌓인 엄마의 장독대가 그리워 지는 겨울날이예요.
오늘도 사랑해요.
런던에서 막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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